
1990년대 포르쉐는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야심 차게 풀모델체인지를 단행한 964의 판매가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북미 시장 판매량은 1980년대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1993년에는 전성기 대비 10분의 1 수준까지 곤두박질쳤다. 이런 포르쉐 앞에 구원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중국 정부였다. ‘국가가 개인의 자동차 구매를 장려한다’라고 선언한 중국 정부는 자동차 산업 정책의 일환으로 해외 완성차 업체들을 초청해 중국형 인민차 개발을 의뢰했다.
벤츠, 푸조를 비롯한 20개 업체가 경쟁 방식으로 참여한 해당 프로젝트에, 재정난에 몰려 있던 포르쉐 역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뛰어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C88’이라는 이름의 콘셉트카였는데, 이번 시간에는 포르쉐가 만든 이 인민차의 정체와 채택 무산 이후 벌어진 황당한 후일담까지 자세히 짚어보도록 하겠다.

4개월 만에 완성한 4도어 세단, 그런데 포르쉐 로고가 없다
당시 996과 박스터의 일부 부품을 공용화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성공시켰던 벤델린 비데킹 사장의 독려 아래, 바이자흐 연구진은 단 4개월 만에 인민차 콘셉트카를 완성해 냈다. ‘C88’이라는 이름이 붙은 4도어 컴팩트 세단으로, 겉모습만 보면 포르쉐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제안용 모델이었기 때문인지 포르쉐 엠블럼은커녕 로고 하나조차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몇몇 부분에서는 포르쉐다운 흔적이 엿보였다. 1.1리터 수평대향 4기통 엔진을 얹어 최고속도 시속 160km를 목표로 설계했고, 당시 중국 도로에 흔했던 갑작스러운 포트홀에 대비해 운전자의 시야를 높여 전방을 더 넓게 확보하도록 했다. 차명에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는데, 중국을 뜻하는 ‘C’에 길한 숫자로 여겨지는 8을 겹쳐 넣었다. 여기에 정점을 찍은 것은 C88을 중국 정부 수뇌부 앞에서 공개하던 날, 비데킹 사장이 직접 중국어로 연설을 했다는 사실이다.

20개 업체 모두 탈락, 4년 만에 백지화된 프로젝트
르망 24시 최다 우승, 파리-다카르 랠리 연패, 아우토반의 제왕이라 불리던 포르쉐가 이 정도로 공을 들였음에도 결과는 탈락이었다. 결국 참여한 어떤 업체의 제안도 채택되지 않았고, 중국 정부는 4년간 진행하던 이 자동차 산업 협업 계획 자체를 일방적으로 종료해 버렸다. 포르쉐는 C88 한 대만으로 연간 300만 대 판매를 계획했을 정도로 진심이었던 만큼, 이 탈락 소식에 크게 낙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때 중국향으로 개발했던 FCC(패밀리 카 차이나)를 훗날 A클래스로 재탄생시켜 정식 출시하는 저력을 보였지만, 애초에 패밀리카 자체가 포르쉐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시도였던 만큼 C88은 콘셉트카 단 1대만 제작된 채로 프로젝트가 끝나고 말았다.

설상가상, 디자인까지 그대로 베낀 중국 업체
여기서 끝났다면 ‘아쉬운 해프닝’ 정도로 남았겠지만, 후일담은 한층 더 씁쓸하게 흘러갔다. 한 중국 자동차 업체가 C88의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베껴 실제 판매용 차량으로 내놓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르쉐도 결국 법적 대응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수천 년에 걸친 모방 문화가 뿌리 깊었던 상대 측에서는 ‘남의 아이디어를 따라 하는 것이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옅어, 이렇다 할 결론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일부 업계 소식통은 당시 중국 당국이 포르쉐를 비롯한 해외 업체들의 아이디어와 기술에 접근해 자국 제조업 활성화에 활용하려던 계획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은 채 소문 수준에 머물러 있다. C88이 좌초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 본토에서만 연간 8만 대의 포르쉐가 팔리고 있다는 점은 비데킹 전 사장에게 작은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잘 팔리는 만큼 여전히 끊이지 않는 디자인 표절 시도를 보면, 포르쉐와 중국의 관계가 판매량이 보여주는 것만큼 순탄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